top of page

씩씩한 (추상적) 부정의 노동

서평주 《괴상한 춤》전시에 관하여

 

서동진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 

 

브레히트는 뚱한 어조로 독일의 산업자본을 상징하던 아에게(AEG)나 크루프(Krupp)의 공장 사진을 두고 훈계조의 이야기를 던진 적이 있다. 브레히트 가로되, 그런 사진들은 공장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루프 공장이나 아에게 공장 사진은 이 회사들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드러내주지 못한다. 현실은 기능적인 것의 영역 속으로 미끄러져 버린다. 이를테면 인간관계의 물화 즉 공장은, 그런 관계들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구성해야 할 무엇’, ‘인위적이고’, ‘고안되어야 할’ 무엇이 있다.” 이때 브레히트는 사진적 리얼리즘에 대하여 퉁명스럽게 타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때문이다. 자본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혹은 자본이라는 ‘현실적인 추상(real abstraction)’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나아가 사이비구체(성)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는 비판적 구체성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이런 물음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리고 이는 굳이 마르크스주의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예술적 실천에 참여하는 이들에겐 달아날 수 없는 쟁점이라 할 수 있다. 

근년 우리는 갑자기 자본을 미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관한 논쟁이 되돌아온 건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만큼, 일련의 도발적인 작업들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앨런 세큘라Allan Sekula와 노엘 버치Noël Burch의 <잊혀진 공간 The Forgotten Space>(2010)이나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의 <이데올로기적 고대로부터 온 소식: 마르크스-에이젠슈테인-자본 News from Ideological Antiquity - Marx/Eisenstein/The Capital>(2008),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 Arbeiter verlassen die Fabrik>(1995)이나 안체 에만Antje Ehmann과 함께 작업한 <노동의 싱글숏 Labor in a Single Shot>(2011-2017) 같은 비디오 워크숍 작업들은 물론 재커리 폼왈트Zachary Formwalt의 <자본의 이미지 In Place of Capital>(2009), <사영기하학 A Projective Geometry>(2012), <언서포티드 트랜짓 Unsupported Transit>(2013) 등의 영상설치 역시 그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자유낙하In Free Fall>를 비롯한 여러 비디오, 영상설치, 렉처 퍼포먼스 등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금융화된 자본주의라는 오늘날의 극도로 추상적인 자본주의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혹은 완곡하게 다룬다. 세큘라와 버치는 생산의 전지구적 분업을 극대화시키는데 기여한 컨테이너화나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무엇보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낳은 세계를 추적한다. 여기에서 그러한 자본의 운동을 서사화하는 데 나서는 주체는 컨테이너이다. 컨테이너로 상징되는 현 단계 자본주의의 로지스틱스는, 당연한 말이지만, 컨테이너선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물론 항만 노동자에서부터 특별경제구역의 농민공에 이르는 다양한 인격적인 주체들을 자석처럼 결합한다. 그러나 <잊혀진 공간>이란 제목이 상기시켜주듯, 세큘라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자본의 세계를 재현하고자 분투한다. 그것은 우리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발굴하고 기록하며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세큘라는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룬 파로키는 마르크스가 󰡔자본󰡕의 첫 번째 권에서 제안했던 유명한 충고를 따르는 듯한 몸짓을 취한다. 마르크스는 더 많은 가치를 낳는 화폐로서의 자본이라는 자본에 관한 최초의 정식을 제시하고는, 그 자본의 자기증식의 비밀을 풀기 위해 우리가 생산과정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파로키는 마치 그런 조언을 따르겠다는 듯 영화의 역사에서 나아가 이미지의 역사에서 노동이 재현을 거부당하거나 억제되어 왔음을 식별하고 개탄한다. 그리고 <노동의 싱글숏>은 직접적인 노동 현장을 싱글숏으로 기록하고 보고한다. 그러나 폼왈트는 파로키의 접근과는 사뭇 대조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언서포티드 트랜짓>에서 렘 콜하스가 설계한 센젠의 증권거래소의 건설 현장의 저속촬영 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이자 낳는 자본’, 더 많은 돈을 낳는 돈으로서의 오늘의 금융자본,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가공자본 혹은 의제자본과 비교한다. 더 큰 크기로 자신의 가치를 증식하는 화폐가 노동을 전혀 보여주지 않듯이 빈터에서 건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순식간에 보여주는 영상 이미지는, 노동을 완전히 재현의 장으로부터 제거한다. 저속촬영되어 재생되는 건물의 이미지 속에는 그 건물을 가능케 했던 숱한 노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재커리 폼왈트는 자본과 영상 이미지의 관계 사이에 모종의 상동성이 있음을 폭로한다. (오늘날 이자 낳는 자본의 전형적인 운동인) M-M’(M=화폐이며, M’=보다 큰 크기의 화폐)이 노동 없는 가치증식이라는 환영을 생산하듯, 오늘날의 (영상) 이미지는 사회적 관계를 감춘 채 세계를 이미지화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총체화하는 자본의 운동을 추적하고자 시도하는 세큘라나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변증법을 동원하며 ‘노동’의 세계를 드러내는 파로키와 달리, 자본의 운동은 직접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임을 치밀하게 논증한다. 

서평주 작가의 《괴상한 춤》 전시는 이러한 자본의 재현이라는 주제에 다가선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 다가서는 방식은 알렉산더 클루게가 에이젠슈테인의 마르크스의 대작 󰡔자본󰡕을 영화화하려던 기획을 스스로 주해하고 실현하려던 방식과는 반대쪽의 지점에 선다. 에이젠슈테인은 󰡔자본󰡕을 영화화하고자 하려던 자신의 기획을 엿볼 수 있는 노트를 남겼다. 「영화 <자본>을 위한 노트」가 그것이다. 그를 들춰보면 그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형식을 이용해 자본의 총체성을 재현할 수 있는 방식을 애타게 궁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클루게는 이를 인용하고 또 참조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를 재현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자신의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그런데 클루게의 <이데올로기적 고대로부터 온 소식>은 에이젠슈테인적인 사고에 바탕한 것이라기보다는 지독히 클루게적인 것에 가깝다. 클루게적인 것이라는 것은 바로 그가 자본의 초감각적 추상성을 감각적 구체성 속에서 찾아내려는 것이다. 하나의 개별적인 감각적 경험 속에서, 자본의 추상성에 의한 규정을 식별하고 그것을 잇는 복잡한 연관과 매개를 발견하고자 할 때, 클루게는 자족적이면서 비할 대 없이 자기의 직접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경험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엔 자본의 낙인이 깊이 찍혀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동료인 오스카 넥트와 수십 년간 기이한 사화학적인 비평 작업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업은 거의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크고 작은 일화(逸話, anecdotes)로 구성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수많은 일화와 사건들의 카탈로그 목록과 같은 것을 통해 자본의 총체성이라는 것을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잠깐 일별할 수 있을 것임을 약속한다. 구체적인 것들(그에게서는 예화들)의 한없는 행렬은 그를 접하는 이들의 연상작용을 통해 어떤 이미지를 획득하도록 이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앞서 보았던 추상으로서의 자본이라는 것에 대한 반격으로서 노동의 이미지를 제안하는 파로키와도 다른 접근을 취하고, 자본의 운동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저변을 가시화하고자 하는 세큘라와도 갈라서며, 무엇보다 자본의 재현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자본에 대한 비판적인 재현에 가까운 것임을 단언하는 폼왈트와는 대척점에 서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서평주의 《괴상한 춤》의 작업들은 어떨까. 

서평주의 작업이 흥미롭고 또 터무니없기까지 하다는 인상에 이르게 되는 것은, 이러한 근년의 작업들로부터의 인상에서 비롯된다. 그는 자본의 폭력을 실업, 빈곤, 양극화, 환경 파괴 등의 ‘사회 문제’로 환원하면서 자본주의를 사회학화하는 흔한 접근방식과 단호하게 갈라선다. 또한 자본에 관해 말한다고 하지만 실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어떤 인격적 주체를 고발하고 그에 의해 희생당하는 피해자의 눈물겨운 삶을 고발하는, 흔히 ‘착취 포르노’라고도 부르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서사에 대해서도 한 치의 양보를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다시 한번 말하자면, 터무니없으리만치 추상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자본의 운동과 정면 대결하고 그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에 가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자본의 리얼리즘’(마크 피셔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자본주의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자본의 리얼리즘이다)에 이르기 위해 자본주의에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 그 자체라고 말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갑과 을의 주종관계로 자본의 지배를 인격(주의)적으로 물화시키는, 오늘날 성행하는 희한하게 전도된 채 횡행하는 물신주의 이데올로기에 그가 민감하게 반발하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그는 자본의 추상성을 말할 수 없다고 발뺌하지 않는다. 자본의 지배는 역사적이고 동시대의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형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일 것이다. 이 때 유의할 점은 신자유주의란 자본이 자신의 위기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하고 의지하는 정치적 형식이지 자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서평주의 자본의 (역사적) 재현이라는 프로젝트가 흔들리는 지점은 여기에서 기원한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는 토대에 의한 상부구조의 결정이라는 주장을 참조하자면, 자본은 자기 자신이기 위해 역사적으로 특수한 정치형태를 규정한다. 즉 토대는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이를 자본주의의 역사적 시간성이란 관념에 대입하자면, 자본은 자신의 보편적인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즉 가치증식을 영구화하기 위해, 자신의 지배형식을 역사적으로 바꾼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에게 있어 시간성이란 자신의 무시간적인 지배를 위해 생산된 역사적인 시간성의 역설을 가리킨다. 기업가적 자본주의에서 법인자본주의로 그리고 다시 오늘날의 금융화된 자본주의로의 역사적인 이행, 즉 자본의 역사적인 차이화는 곧 자신의 보편적인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자 분투한 결과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은 가치증식이라는 맹목적인 자기동일성의 백치 같은 시간을 통해 움직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역사적인 형태를 생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생성된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위기와 모순의 효과라고 짐작할 수 있다. 어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말을 빌자면 현실사회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초래된 자본과 노동의 역사적인 타협이 낳은 자본의 위기 상황에서 ‘자본의 반격’이 감행된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그러나 서평주는 자본이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선택으로서의 신자유주의를 자본과 동격처럼 취급된다. 따라서 그는 자본의 재현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재현으로 대체하려는 발상으로 미끄러져 버리는 듯이 보인다. <열병의 시간들-레이건 연설> <열병의 시간들-대처 연설> <열병의 시간들-소비에트의 마지막>, <열병의 시간들-소비에트 해체 발표>로 구성된 영상설치 작업은 이를 예시한다. 그러나 왜 레이건과 대처의 집권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계기인가. 멕시코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의 외채위기나 연방준비제도의 이자율 인상은 왜 아닌가? 장기간의 불황으로 인한 석유 수출의 위기를 겪은 구(舊) 소련의 경제난은 왜 아닌가? 생산성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정보통신기술과 컨테이너화를 비롯한 수송혁명 등의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전은 왜 아닌가? 등등의 질문은 왜 삭제되었을까. 그는 자본에 관해 말하고 싶어 하지만 그리고 자본의 역사적인 총체성에 관해 말하고 싶어 하지만, 그를 말하려다 말고 자본의 추상적 지배를 은폐하며 그것을 정치적 당파 사이의 드라마를 상연하는 정치라는 심급(審級, instance)에 너무나 많은 눈길을 준다.

‘열병의 시간들’은 자본의 역사적인 변조(metamorphosis)의 순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연대기적인 시간은 정치적인 흥망성쇠를 가리킬 뿐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레이건, 대처의 집권은 신자유주의의 출현을 알리는 흔한 표준적인 서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실상 자본의 반격이라는 ‘역사적인 계급투쟁’(나는 이것을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인격적인 집단들 사이의 쟁투로 극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자기운동의 모순이 상연되는 방식으로서 고려되어야 한다)이 외화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치적 당파 사이의 투쟁으로 자본의 운동을 각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괴상한 춤> - 이 작업은 이윤의 세 가지 원천에 대한 마르크스의 신랄한 비판을 참조한다 - 이나 <뒤집힌 세계> - 이 설치 작업 역시 자본의 물신적 전도, 저 유명한 카메라 옵스큐라와 자본의 상동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을 참조한다 - 와 같은 작업들이 어떻게 서로 접합될 수 있을지 궁금해지게 된다. 이 작업들은 자본의 보편적인 운동을 언급하는 시각적인 알레고리가 되길 자처한다. 그러나 자본의 추상성을 그러한 미적 추상 자체를 통해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흥미롭지만 받아들이기 난감한 발상이다.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 말레비치 식의 모더니즘적인 추상은 시각적 추상이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와 사진의 성행이 초래한 자본주의의 타락한 구체성으로부터 탈출 혹은 구원을 위한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서평주의 작업에서 놀라운 점은 그러한 모더니즘적인 추상의 유토피아적인 동기가 고갈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것을 참조할 수 있다는 듯한 시늉을 취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적인 추상은 자본주의의 타락한 현실의 외부로서 예술을 상상하려던 여러 가지 시도의 선두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를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모더니즘의 미적 추상은 자본주의적 물질문화의 (사이비) 구체 대 추상의 비판성(예술의 자율성을 상징화하는)이라는 대립 관계를 가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대립을 상정할 수 있었던 모더니즘적인 단계에서의 예술의 자율성은 소멸하였다. 특히 기호자본주의나 미적 경제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미적인 것은 완전히 경제와 통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의 문화적 전환이라는 관념이 말해주듯, 상품은 거의 예술작품처럼 보이고, 우리는 생리적인 만족을 위해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달해준다고 약속하는 미적인 경험을 소비한다. 그렇다면 미적인 추상이 효험을 발휘할 수 있던 미적인 것의 자율성의 시대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역사적인 과거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상(화)의 미적 형식을 선호(?)하는 것은, 그것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지각과 경험을 이끌어내겠다는 작업에서 등장하는 것은, 미심쩍은 일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구체적인 경험이 틈입하지 않도록 밀봉되어야 할 추상이, ‘설치’라는 형식을 통해 일종의 자기 패러디를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믿음의  자리>나 <검은 구멍으로 쌓은 탑>, <사건에서 신화까지>와 같은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작업들은, 추상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관객의 구체적인 경험을 요구하는 설치작업이다. 프로파간다적인 정치적 인물의 이미지가 걸려있었을 액자를 감싸는 붉은 천을 사진 액자가 걸렸을 위치에 자리한 <믿음의 자리>, 연무 속에서 자신의 불투명한 실루엣을 보여주는 맥주병(물론 이는 몰로토프 칵테일 혹은 화염병의 은유이자 반체제적 투쟁의 상징일 것이다)이 놓여있는 아크릴박스를 설치한 <사건에서 신화까지>는 추상적인 외양을 취하지만 실은 매우 구체적이다. 설치는 관객들이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의 경험을 통해 말을 건네는 형식이다. 그러나 자본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재현될 수 없다. 우리가 상점에서 볼 수 있는 객체는 사용가치를 지닌 구체적인 사물이지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이 아니다. 우리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샴푸, 가공육, 장난감, 음료수 따위를 볼 수 있을 뿐, 이 모든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는 유일한 동기이자 목적일 모든 구체적인 대상을 등가화하는, 가치로서의 상품을 볼 수는 없다. 우리가 공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유용 노동이지 추상적인 노동이 아니다. 우리는 조립을 하거나 봉제를 하거나 컴퓨터를 조작하는 구체적인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목격하지 노동력 상품의 운동이 현상하는 광경을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본의 운동을 구체화하여야 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처럼 자본은 재현할 수 없지만 그러한 자본의 총체성은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 허구적인 서사를 통해 재현되어야 한다. 그것을 그는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이라고 부른다. 



그러나 나는 서평주의 《괴상한 춤》 전시가 자신을 반자본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는 엉뚱한 작가의, 유치한 자기현시적인 욕망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비웃고자 하는 이들에게 미리 조언하고 싶다. 서평주 작가의 자본을 이미지화하려는 프로젝트는 이미 실패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충실하게 그 실패를 위해 작업한다. 그가 설령 자신의 작업을 통해 자본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재현할 수 있었다고 믿고 싶더라도 그 재현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소재들(맥주병, 비디오 이미지, 주두부, 자수 등등에 더해 그것이 설치되는 공간적 배경 자체)은, 자본의 추상(성)을 말하는 데 실패한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려는, 이 집요한 비판적인 욕망을 서툰 포스트-개념주의적인 장난이라고 폄훼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례한 짓이다. 사물의 직접적인 (사이비) 구체성을 예찬하고, 지금-여기의 (사이비) 경험의 가치를 강변하는 데 지칠 줄 모르는 동시대 미술의 풍경을 염두에 둔다면, 서평주의 도전은 청량하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아름다운 실패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본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준다기보다, 그 물음의 아포리아, 즉 이율배반에 대해 질의한다. 모순은 중재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모순은 그것을 초래하는 조건을 제거함을 통해서만 해결된다. 그것은 자본의 추상과 미적인 것의 구체 사이의 모순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서평주는 그 모순에 대해 더없이 충실하다. 

bottom of page